기사 핵심 요약
박연술의 춤은 제주 4·3의 기억과 해녀의 삶을 소리·연극·음악과 결합해 전통춤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보여줬다.
- 박연술의 춤은 제주 4·3과 해녀의 삶을 전통무용과 다른 예술로 연결했다.
- 소리·연극·첼로·캘리그라피·타악이 작품마다 다른 표현을 더했다.
- 해녀 이야기의 관객 참여와 전통춤의 재해석이 공연의 특징으로 남았다.

춤이 끝난 뒤에도 관객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무용수의 몸짓일 수도 있지만, 무대에서 들은 누군가의 목소리나 자신이 살아온 지역의 이야기가 더 오래 기억될 수도 있다.
지난 10월 23일 오후 7시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제주연무용단의 2026 정기공연 ‘COLLABO X : 섬을 춤추다’는 박연술의 춤을 중심으로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무대였다.
제주 4·3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살풀이, 해녀의 삶을 담은 춤과 연극, 사라져가는 생명을 향한 기도, 사물놀이와 광대무까지. 작품의 소재는 서로 달랐지만 그 안에는 제주라는 공간에서 이어져 온 기억과 사람들의 삶이 놓여 있었다.
총기획과 예술감독, 안무를 맡은 박연술은 소리꾼 문석범, 연극인 현애란, 첼리스트 문지윤, 아트캘리그래퍼 김효은, 타악연주가 기종석과 협업했다. 제주연무용단과 광개토제주예술단도 공연에 참여했다.
이번 무대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단순히 여러 예술가가 함께 출연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각 작품이 전달하려는 이야기에 따라 소리와 연극, 음악과 시각예술을 다르게 활용했다는 점이다. 춤이 모든 이야기를 혼자 전달하기보다 다른 예술과 표현의 역할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박연술의 춤에 다른 예술가들이 필요했던 이유
한 사람의 무용가가 중심이 된 공연이지만, ‘COLLABO X’에서는 다른 예술가들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됐다. 역사적 상실을 다룰 때는 소리꾼의 진혼곡을, 해녀의 일상을 이야기할 때는 배우의 목소리와 기록 영상을 선택했다.
이러한 구성은 전통춤의 표현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몸짓만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구체적인 이야기는 연극과 영상이 보완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은 춤과 음악이 맡는 방식이다.
여기서 협업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분야의 예술가가 출연했다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 장르가 자신의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주제를 함께 전달할 때 비로소 협업이 작품의 구성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번 공연은 제주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 다양한 예술을 배치했다. 다만 모든 작품이 같은 방법으로 협업한 것은 아니었다. 애도와 노동, 생명의 회복, 공동체의 놀이처럼 작품의 성격에 따라 표현 수단을 달리한 점이 특징이다.
박연술의 춤은 공연을 이끄는 중심이었지만, 다른 예술의 언어에도 이야기를 전달할 자리를 내주었다. ‘COLLABO X’라는 제목에서 주목할 부분도 바로 이러한 관계다.
해녀의 이야기가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좁히다

해녀의 삶을 다룬 ‘바당족은똘’은 공연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한 작품이다. 박연술과 연극인 현애란의 협업으로 구성된 이 무대에는 해녀 할망의 인터뷰 자료 영상과 1인극, 춤이 함께 사용됐다.
현애란이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객석의 호응이 이어졌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바라보던 관객이 공연의 흐름에 반응하면서 해녀의 삶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소재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해녀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해녀는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지만, 상징이라는 이름만으로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바다에서 일하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온 시간, 반복되는 노동과 그 안에서 만들어진 생활의 기억은 관광 이미지 속 해녀의 모습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바당족은똘’은 실제 해녀의 인터뷰 기록을 활용해 이러한 간격을 좁히려 했다. 무대 위 배우와 무용수가 해녀의 삶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당사자가 남긴 이야기를 작품에 연결한 것이다.
연극은 인물의 목소리와 상황을 구체화하고, 춤은 그 안에 놓인 감정을 몸의 움직임으로 전달한다. 기록 영상은 예술적 표현이 실제 사람의 경험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어진 ‘해녀아리랑’과 ‘바당구진날’도 해녀의 삶을 서로 다른 정서로 표현했다. ‘해녀아리랑’이 삶의 애환을 춤으로 풀어냈다면, ‘바당구진날’은 궂은 날에도 이어지는 노동을 즐거운 움직임으로 형상화했다.
해녀의 삶에는 고단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 속에서도 일상을 꾸려가고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존재한다. 공연은 해녀를 슬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삶의 활력까지 함께 다루려 했다.
특히 관객의 호응이 기록된 ‘바당족은똘’은 지역의 삶을 다루는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관객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제주 4·3의 슬픔을 설명보다 춤으로 전하다
공연의 첫 작품인 ‘휘어살풀이’는 제주 4·3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를 담았다. 소리꾼 문석범이 창작한 진혼곡과 고 정재만 선생의 살풀이춤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박연술의 춤이 만난 작품이다.

역사적 비극을 공연예술로 다룰 때는 사건을 얼마나 자세히 재현하는가 못지않게 그 기억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는지가 중요하다.
‘휘어살풀이’가 선택한 방식은 사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애도의 감정을 춤과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살풀이는 맺힌 감정과 한을 풀어내는 뜻을 지닌 전통춤이다. 여기에 희생자를 위한 진혼곡이 더해지면서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춤은 공동체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와 연결된다.
춤은 제주 4·3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기록물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말로 전하기 어려운 상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역할을 맡는다.
이어진 ‘제주 살풀이’에서는 전통춤의 계보와 제주의 장단이 만났다. 한영숙제 정재만류 살풀이를 바탕으로 제주굿의 연물장단을 활용해 재해석한 작품이다.
같은 살풀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지만 두 작품의 접근은 다르다. ‘휘어살풀이’가 애도의 의미에 집중했다면, ‘제주 살풀이’는 전승된 춤의 형식과 지역의 음악적 요소를 결합하는 데 무게를 뒀다.
이 차이는 전통춤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스승에게 배운 형식을 이어가는 일과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의 문화를 새롭게 담아내는 일이 반드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박연술의 살풀이는 전승된 춤이 제주라는 지역을 만나 어떤 표현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게 했다.
첼로와 캘리그래피가 함께한 생명의 기도

‘블러썸(Blossom)’은 죽어가는 생명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기도와 의식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박연술의 춤에 첼리스트 문지윤의 연주와 아트캘리그래퍼 김효은의 작업이 결합했다.
앞선 작품들이 제주 4·3과 해녀처럼 구체적인 역사와 인물의 삶에서 출발했다면, ‘블러썸’은 생명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주제로 시선을 넓혔다.
이 작품에서 각 예술은 서로 다른 표현 수단을 갖는다. 춤은 몸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하고, 첼로는 음악의 흐름을 만든다. 캘리그래피는 글씨를 쓰는 행위와 그 결과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캘리그래피는 무용이나 음악과 달리 움직임의 흔적이 형태로 남는 예술이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춤과 소리 사이에서 글씨라는 시각적 요소를 함께 배치한 점은 표현 방식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의 주제 역시 단순한 희망의 표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명이 다시 피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동시에 사라져가는 생명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블러썸’은 지역의 특정한 사건에서 출발한 공연이 생명이라는 공통된 문제까지 다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성이다.
다만 여러 장르가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할 수는 없다. 춤과 음악, 시각예술이 실제 무대에서 얼마나 긴밀하게 호흡했는지는 구체적인 공연 기록과 장면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
그럼에도 ‘블러썸’이 지닌 기획상의 의미는 분명하다. 춤이 다른 예술과 만나면서 주제를 표현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했다는 점이다.
사물놀이와 광대무, 관객과 호흡하는 전통예술
공연 후반부에는 광개토제주예술단의 사물놀이 ‘놀판’과 박연술·기종석의 즉흥 대무, 제주연무용단 등이 함께하는 ‘광대무’가 이어졌다.
앞선 작품들이 역사와 삶,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후반부는 타악과 춤의 역동성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사물놀이는 연주자 사이의 호흡과 장단의 변화가 중요한 예술이다. 춤과 결합할 때는 음악이 단순한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무용수의 움직임과 관계를 맺는다.
박연술과 기종석의 즉흥 대무도 이러한 관계를 드러내는 형식이다. 정해진 안무를 재현하는 방식과 달리, 춤과 연주가 서로 반응하며 이어지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광대무’는 고 정재만 선생의 춤을 계승한 작품이다. 제주연무용단은 2024년 4대 벽사 정용진 선생에게 광대무를 사사한 바 있다.
전통춤의 전승은 특정한 동작을 보존하는 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운 춤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다른 예술가와 호흡하며 새로운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도 포함된다.
이번 공연에서 광대무와 사물놀이가 만난 것은 이러한 전승의 현재성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과거에 형성된 춤이 지금의 연주와 공연 환경 속에서 다시 실연됐기 때문이다.
관객의 호응 또한 지역 공연이 지닌 가능성을 보여주는 요소다. 전통예술이 반드시 설명을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남을 필요는 없다. 장단과 몸짓, 무대의 흐름을 통해 관객이 함께 반응할 수 있는 공연이 될 수 있다.
박연술의 다음 무대에 남은 과제
2026 제주연무용단 정기공연은 박연술의 전통춤을 중심에 두면서도 소리와 연극, 음악, 시각예술의 역할을 넓히려는 시도였다.
제주 4·3의 기억에는 진혼곡을, 해녀의 삶에는 연극과 인터뷰 기록을, 생명을 향한 염원에는 첼로와 캘리그래피를 더했다. 사물놀이와 광대무는 전통의 전승과 공동체적 놀이의 의미를 공연 후반부에 배치했다.
협업이라는 형식이 앞으로 더 깊어지기 위해서는 각 장르를 한 무대에 모으는 것을 넘어, 작품 안에서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 중요하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방식에도 같은 질문이 적용된다. 제주를 대표하는 소재를 무대에 올리는 것만으로 지역의 이야기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개별적인 목소리와 경험을 얼마나 섬세하게 담아내는지가 작품의 깊이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실제 해녀의 인터뷰 자료를 활용한 ‘바당족은똘’은 주목할 만하다. 예술가의 해석에 삶의 당사자가 남긴 기록을 연결해 이야기의 출발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이 보여준 박연술의 선택은 전통춤의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장르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어온 춤을 중심에 두되, 그 춤이 담을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을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넓히는 방식이었다.
박연술의 다음 무대에서 주목할 부분도 여기에 있다. 다른 장르와의 만남이 작품의 표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제주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COLLABO X : 섬을 춤추다’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창작이 풀어가야 할 질문을 남긴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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